레온드력 406년 11월 3일. 잿빛 하늘에 첫서리가 내렸다.
서산의 재앙 이후 생환한 기사단장 로데릭 홀트 경과 기록관 시어도어 서머싯은 왕명에 따라 왕도 외곽의 하사 저택에서 공동 생활을 시작했다. 목적은 두 가지였다. 전쟁의 전말을 기록할 것, 그리고 다음 봄까지 혼인을 유지할 것. 두 사람 모두 혼인을 원하지 않을 경우 왕명은 없던 일이 된다.
이것이 그날의 공식적인 기록이다.
그리고 이제부터 쓸 것은, 내가 기록하지 못했던 이야기이다.
— 레온드력 476년, 시어도어 H. 서머싯의 회고록 『기록되지 않은 겨울』 중에서.
알현실에서 왕이 한 말은 길지 않았다.
“홀트 경은 토벌의 영웅이며, 그대는 왕실의 기록을 잇는 자다. 두 사람은 다음 봄까지 한 지붕 아래 지내며, 서산의 재앙과 용 토벌의 전말을 기록하라.”
왕의 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평온했다. 시어도어는 그 평온함이 싫었다. 수백 명이 죽었다. 기사단 하나가 사라졌고, 살아 돌아온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그런데도 왕에게 그것은 국정의 한 줄과 혼인 약속 하나를 처리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은 덧붙였다.
“다음 봄까지 한 지붕 아래 지내라. 그때도 둘 다 아니라 하면 없던 일로 하겠다.”
대리석 기둥 사이에서 중신들의 웃음이 터졌다. 시어도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부모의 오래된 약속이 다시 왕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보다, 그 약속이 사람 하나의 생사를 농담거리로 만드는 방식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몇 시간 뒤. 왕도 외곽의 하사 저택 앞에 첫서리가 내려앉았다. 회색 돌로 지은 2층 저택이었다. 집사가 문을 열었고, 하녀 둘의 시선이 먼저 시어도어의 옷깃에 닿았다. 낯선 가문의 문장과 기록관의 은핀이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리고서야 현관 안쪽을 바라보았다. 벽에 등을 기대고 선 남자가 있었다. 검은 상의 하나만 걸친 차림이었다. 허리에는 롱소드가 매여 있었고, 그 옆에는 이 집 안에서 쓸 일이 없을 것 같은 방패 하나가 벽에 기대어 있었다.
로데릭 홀트. 서산의 재앙을 홀로 베고 돌아온 남자. 최연소 기사단장. 그리고 왕이 치하라는 이름으로 시어도어를 붙여준 남자. 녹색 눈이 시어도어를 위에서 아래로 한 번 훑었다. 무언가를 재는 눈이었다.
"그쪽이 포상이란 거군요. 축하드립니다, 나리. 어느 포크를 쓰는지도 모르는 평민을 하나 얻으셨네."
남자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내용과 다르게 축하한다는 말투는 아니었다.
"방은 복도 양끝입니다. 저녁은 일곱 시. 전 안 갑니다."
그는 더 말할 것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두 번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이 삭막한 저택에 강제로 입성한 후, 자신의 약혼자라고 하는 이의 냉소와 마주하고 시어도어는 작게 한숨을 삼켰다. 첫 만남임에도 벌써 거절당한 기분이다.
"경, 저 때문이라면 제가 방에서 식사를 하죠. 당신께 주어진 저택 아닙니까, 좋은 곳에서 드세요."
계단 중턱의 발소리가 멈췄다. 돌아보지는 않았다. 등만 보였고, 그 등이 아주 잠깐 굳었다가 다시 풀렸다. 로데릭의 왼손이 난간을 잡았다. 그것이 습관인지 의도인지는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질 만큼 힘이 들어갔다가, 천천히 펴졌다.
"…알아서 하십쇼. 여기 제 것도 아닙니다."
'제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건 맞는 말이다. 여기에 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로데릭은 냉소했다. 반박이 아니었다. 시어도어가 내민 양보를 잡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사실을 말한 것이었다. 왕이 내린 집, 왕이 내린 사람, 왕이 내린 직함. 이 석조 건물 안에서 로데릭 홀트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허리춤의 롱소드와 벽에 기댄 방패뿐이었다. 그가 2층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집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흰 머리칼이 깔끔하게 빗어 넘겨진 노인은 시어도어에게 허리를 굽혔다.
"서머싯 도련님, 방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집사의 손이 가리킨 방향은 복도 동쪽 끝이었다. 반대편 서쪽 끝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에 긴 복도 하나, 닫힌 문 여섯 개. 현관에 남겨진 시어도어의 짐 위로 저녁 서리의 냉기가 문틈을 타고 스며들었다. 여행 가방 옆에 묶인 필기 도구함의 가죽 끈이 차갑게 젖어 있었다. 집사가 한 가지를 덧붙였다.
"단장님은 매일 새벽에 뒤뜰에 나오십니다. 그때만은…… 말을 걸지 않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 목소리에는 경고가 아니라 부탁이 실려 있었다.
"호칭부터 수정하죠. 시어도어 기록관, 그거면 됩니다. 다른 사용인들께도 일러두세요.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제게 예의 차리지 않으셔도 돼요."
사용인에게 존댓말하는 몇 안되는 귀족. 그것이 시어도어였다.
"매일 새벽 뒤뜰에서 무엇을 하길래요?"
집사의 허리가 조금 더 굽었다. 존대를 받는 데 익숙하지 않은 등이었다. 눈이 한 번 깜빡인 뒤, 노인은 시어도어의 얼굴이 아니라 가슴팍에 꽂힌 서머싯 가문의 은핀을 보았다. 기록관이라는 직함을 저울질하듯.
"검을 손질하십니다."
그것뿐이었다. 하녀 하나가 여행 가방에 손을 뻗었고, 시어도어의 필기 도구함만은 직접 들었다. 가죽 끈의 차가운 습기가 손바닥에 옮겨붙었다. 2층 동쪽 끝 방. 문을 열자 서리 낀 창으로 뒤뜰이 내려다보였다. 마른 정원, 깎다 만 풀, 한쪽 구석에 숫돌 하나. 그 옆에 방패가 하나 더 있었다. 낮에 쓰던 것이 아니라 날이 패인 오래된 것이었다.
복도 반대편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식사 시간이 와도 발소리는 없을 터였다. 집사가 물러나기 전 한마디를 남겼다.
"기록관님, 단장님은 손질이 끝나면 칼을 놓지 않고 한참을 앉아 계십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문이 닫혔다. 시어도어는 도구함의 잠금쇠를 풀고, 빈 첫 장을 펼쳤다. 레온드력 406년 11월 3일. 날짜 아래 적을 첫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뒤뜰의 숫돌 옆, 날이 패인 방패. 그것이 누구의 것이었는지를 아직 물을 수 없었다.
"기사들에게 검을 손질하는 시간은 중요하다고 듣긴 했어요. 그런 이유만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 침묵이 긍정인지, 더 말할 수 없다는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시어도어는 더 묻지 않았다.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동쪽 끝 방. 로데릭은 시어도어와 마주칠 일이 없도록 가장 먼 방을 골랐을 것이다. 반대편 서쪽 끝에 로데릭의 방이 있으리라는 것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어도어와 실수로라도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느껴졌다.
왕명은 명확했다. 전쟁의 전말을 기록할 것. 로데릭의 협조를 얻어내기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도 이미 알았다. 그렇다고 기록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왕명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록관으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 시어도어는 책상 앞에 잠시 앉아 있다가 다시 일어났다. 아직 짐도 풀지 않은 채, 저택을 둘러보기로 했다.
저택은 사람이 살기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라 왕의 하사품으로 존재하기 위해 지어진 것 같았다. 벽난로 위 선반에는 장식 하나 없었고, 응접실 탁자에 먼지가 고르게 앉아 있었다. 누군가 닦았지만 아무도 앉지 않는 탁자의 먼지. 시어도어는 탁자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한 번 쓸어보고 서고로 향했다.
서고는 작았다. 선반 세 칸. 국법 편람, 기사 서임 예법집, 레온드 왕가 연대기 초본. 왕실에서 채워 넣은 것들이 분명했다. 그 사이에 한 권, 등이 갈라진 책이 꽂혀 있었다. 뽑아보니 검술 교범이었다. 책을 펼치자 여백에 빽빽한 필기가 나타났다. 글씨는 둘이었다. 하나는 작고 각이 졌다. 문장마다 교정과 전술에 관한 주석이 붙어 있었다. 다른 하나는 크고 흘려 쓴 글씨였다. 같은 구절에 밑줄을 긋고도 서로 다른 말을 남겨놓았다. 시어도어는 두 필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누가 누구의 글씨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같은 책을 펼쳐 같은 문장을 읽었던 시간만큼은, 아직 여백 어딘가에 남아 있는 듯했다. 시어도어는 책을 덮어 제자리에 꽂았다.
뒤뜰로 통하는 유리문 너머로 숫돌이 보였다. 그 옆에는 아까 보았던 방패가 있었다. 깊게 패인 흠집 위로 저녁 서리가 얇게 내려앉고 있었다.
그때 하녀 하나가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찻잔 하나와 저녁 식사 시간을 적은 쪽지가 놓여 있었다.
"기록관님, 단장님 방에도 올려드릴까요?"
시어도어가 대답하기도 전에 하녀가 덧붙였다.
"아마 손도 안 대실 겁니다만."
그저 같은 일을 너무 오래 반복한 사람에게서만 나는 체념이 목소리 아래에 얇게 깔려 있었다. 시어도어의 시선이 쟁반 위 찻잔으로 내려갔다.
“그가 지금까지 이 저택에서 식사를 한 적은 있습니까?”
-여기부터 수정-
하녀의 손이 쟁반 위에서 잠깐 멈췄다. 질문의 무게를 가늠하는 듯했다. 시어도어의 시선이 조용히 그 손 위에 머물렀고, 하녀는 그것을 감시가 아니라 기다림으로 읽은 모양이었다.
"……처음 이틀은 드셨습니다."
그것이 3주 전이었다. 하녀의 목소리는 낮았고, 시선은 뒤뜰 유리문 너머 숫돌 쪽을 향해 있었다.
"셋째 날부터 식탁에 앉지 않으셨어요. 방에 올리면 국물만 식어 돌아옵니다. 빵을 뜯은 적이 있긴 한데, 반쪽도 안 드시고."
쟁반 위 찻잔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하녀가 한 박자 늦게 덧붙였다.
"궁에서 돌아오시면 갑옷부터 벗으시는데, 그 무게가 빠지는 게 보여요. 저희가 뭘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기록관님."
존대였다. 로데릭에게 배운 것인지, 원래 그런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녀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고, 그것은 주인을 두려워하는 자의 자세가 아니었다.
"저녁 쟁반은 올리겠습니다. 늘 하던 대로."
하녀가 물러나고, 시어도어는 필기 도구함을 열었다. 빈 첫 장 위에 날짜 대신 적은 것은 숫자였다. 3주, 이틀. 그 차이에 놓인 무언가의 윤곽.
INFO
[👕: 시어도어 여행복·은핀 | 로데릭 검은 상의·롱소드]
[🎬: 시어도어 서고 창가 ↔ 로데릭 2층 서쪽 방]
[💞: 왕명 약혼자]
[🐉: 🔸]
[🌸봄까지: 약 140일]
💭: 이틀은 먹었다. 그리고 멈췄다. 무엇이 셋째 날에 있었는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셋째 날에 무엇이 있었는지, 이 저택안의 사람들도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나에게는 입을 열지 않는 것인가. 그는 수첩을 들고 펜대를 입가에 두드리며 생각했다. 생각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마저 내부를 돌아보기로 한다.
[ T(5) | 🗓레온드력 406년 11.3 | ⏰18:10 | 🌫️첫서리·해질녘 | 📝저택 내부 탐색 | 📍하사 저택 1층 복도~식당 | ♂️ | 🗡️ | 🔵 ]
복도는 좁지 않았으나 비어서 좁았다. 벽에 걸린 것이 없었다. 가문의 초상도, 사냥 장면의 태피스트리도. 하사품답게 격식만 갖춘 빈 틀 몇 개가 벽에 못 자국을 남기고 있었고, 시어도어는 그것이 이전 사용자의 흔적인지 처음부터 비어 있던 것인지를 구분할 수 없었다.
식당은 여섯 명이 앉을 크기였다. 의자 하나만 뒤로 빠져 있었다. 상석이 아니라 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 나가기 쉬운 쪽을 골랐거나, 상석에 앉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사람의 선택이었다.
식탁보 위에 얼룩 하나 없었다. 3주간 거의 쓰이지 않은 천의 빳빳함이 손끝에 닿았다.
시어도어는 수첩에 식당 배치를 간략히 스케치했다. 빠진 의자의 위치, 문까지의 거리, 창 방향. 기록관의 버릇이었다. 의미를 붙이기 전에 배치를 남기는 것.
부엌을 지나치려는데 집사가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따라온 것인지 발소리가 없었다.
"기록관님."
노인은 시어도어의 수첩을 보지 않았다. 대신 2층을 한 번 올려다본 뒤, 목소리를 한 톤 낮추었다.
"단장님께서 입주하시던 날, 짐이 롱소드 하나와 방패 둘이었습니다. 옷가지는 나흘째 되어서야 기사단 본부에서 가져오셨고요."
방패 둘. 뒤뜰에 날이 패인 것과, 현관에 기대어 있던 것.
"나머지 한 분의 것이냐고 여쭤본 적 있습니다."
집사의 입이 한 번 다물렸다가 열렸다.
"'돌려줄 데가 없어서'라고만 하셨습니다."
돌려줄 데가 없다. 주인이 죽었다는 말의 다른 형태였으리라.
현관 옆 작은 방. 갑옷 거치대가 있었다. 백은 갑주가 걸려 있었고, 흰 망토가 접혀 그 아래 놓여 있었다. 청색 문장이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났다. 망토는 최근에 빨았다. 갑주는 매일 손질한 흔적이 역력했다. 부하가 없는 기사단장의 갑주가 이토록 완벽하게 정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시어도어는 수첩을 펼쳤다. 적은 것은 문장이 아니라 목록이었다. 뒤로 빠진 의자. 문 가까운 자리. 빈 벽. 매일 닦이는 갑주. 반쪽도 뜯지 않은 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해질녘. 집사가 말한 귀가 시간이었다.
부츠 소리가 멈췄다. 갑옷 방 앞에 서 있는 시어도어와, 복도 끝의 로데릭. 녹색 눈이 시어도어의 손에 든 수첩을 보았다.
로데릭|"Finding anything worth writing down, my lord?" (적을 만한 거라도 찾으셨습니까, 나리.)
INFO
[👕: 시어도어 여행복·은핀·수첩 | 로데릭 백은 갑주 위 외투]
[🎬: 복도 양끝 대면 ↔ 시어도어 갑옷 방 앞·로데릭 현관]
[💞: 왕명 약혼자]
[🐉: 🔸]
[🌸봄까지: 약 140일]
💭: 뭘 적고 있는 거다. 이 집에서.
아, 죄송해요. 버릇이라. 수첩 사이에 펜을 낀 채 닫는다. 처음 오는 곳에 오면 늘 이런답니다.
[ T(6) | 🗓레온드력 406년 11.3 | ⏰18:12 | 🌫️해질녘·서리 | 📝갑옷 방 앞 조우 | 📍하사 저택 1층 복도 | ♂️ | 🗡️ | 🔵 ]
시어도어|"Ah, sorry. Force of habit." (아, 죄송해요. 버릇이라.) 시어도어|"I always do this when I visit somewhere new." (처음 오는 곳에 오면 늘 이런답니다.)
수첩이 닫히는 소리가 복도의 정적 위에 얇게 올라앉았다. 펜이 가죽 사이에 끼인 채 멈췄고, 시어도어의 손은 자연스러웠으나 로데릭의 시선은 그 자연스러움에 머물렀다.
갑주 위에 걸친 외투가 한쪽 어깨에서 흘러내려 있었다. 하루 종일 빈 기사단 본부에 앉아 있던 사람의 옷매무새였다. 녹색 눈이 수첩에서 갑옷 거치대로, 거치대에서 다시 시어도어의 얼굴로 옮겨갔다.
로데릭|"Habit. Right." (버릇. 그렇겠죠.)
그가 외투를 벗어 거치대 옆 못에 걸었다. 시어도어와의 거리가 두 걸음으로 줄었다가, 로데릭이 먼저 몸을 틀며 계단 쪽으로 돌아섰다. 부츠 뒤축이 돌바닥을 긁는 소리. 그 소리가 멈추지 않을 줄 알았는데, 계단 첫 번째 칸에서 멈추었다.
로데릭|"The armor room is off-limits. So is the yard." (갑옷 방은 출입금지입니다. 뒤뜰도.)
'출입금지'라는 단어에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위협이 아니라 선을 긋는 손이 떨리지 않으려 빨리 그은 것에 가까웠다. 왼손이 난간 위에서 무언가를 쥐려는 모양을 만들었다가 펴졌다.
시어도어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거부하지도 않았다. 다만 방금 닫은 수첩의 무게가 손 안에서 달라진 것을 느꼈다. 적어둔 목록—빠진 의자, 빈 벽, 날 패인 방패—에 한 줄이 추가되었다. 갑옷 방과 뒤뜰. 출입금지.
기록관은 금지된 장소에서 가장 많은 것을 읽는 사람이었다.
INFO
[👕: 시어도어 여행복·은핀·수첩 | 로데릭 검은 상의(외투 벗음)·롱소드]
[🎬: 복도 갑옷 방 앞 ↔ 로데릭 계단 첫 칸]
[💞: 왕명 약혼자]
[🐉: 🔸]
[🌸봄까지: 약 140일]
💭: 서고는 막지 않았다. 교범의 필적은 괜찮고, 갑옷 방은 안 된다. 그 차이가 뭔지는 아직 모른다.
출입금지의 사유는요? 계단 위의 그를 올려다보며 가볍게 물어봤다.
[ T(7) | 🗓레온드력 406년 11.3 | ⏰18:13 | 🌫️해질녘·서리 | 📝출입금지의 이유 | 📍하사 저택 1층 계단 | ♂️ | 🗡️ | 🔵 ]
시어도어|"And the reason for that restriction?" (출입금지의 사유는요?)
가벼운 어조였다. 따지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는 것에 가까웠고, 밝은 벽안이 안경 너머로 계단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로데릭의 부츠가 한 칸 위에서 멈춰 있었다. 돌아보지 않았으나 어깨가 반쪽만 틀어졌다. 아래를 보려는 것인지 보지 않으려는 것인지 결정하지 못한 각도였다.
로데릭|"Because I said so. Is that not enough for you, my lord?" (제가 그랬으니까요. 그것으로 부족합니까, 나리.)
'나리'가 이를 사이에서 짧게 잘렸다. 비꼼이라기보다는 문을 닫는 소리에 가까웠다. 왼손이 난간을 잡았다가 놓았다. 그 반복을 시어도어는 오늘만 두 번째 보았다.
녹색 눈이 마침내 아래로 내려왔다. 시어도어의 수첩을, 그 안에 적혔을 것들을 가늠하는 시선이었다. 갑옷 방 안쪽, 정비된 백은 갑주와 접힌 흰 망토가 열린 문 너머로 보였을 터였다.
로데릭|"Write what you want about the rest. That room and the yard are mine. The only things here that are." (나머지는 마음대로 적으십쇼. 그 방하고 뒤뜰은 제 겁니다. 여기서 유일하게.)
계단을 올라가는 등이 사라졌다. 서쪽 끝 문이 닫혔다.
시어도어는 수첩을 열지 않았다. 대신 갑옷 방 문틀에 기댄 채 방금 들은 말의 무게를 재었다. 여기서 유일하게 제 것이라 부른 두 장소. 갑주와 방패가 있는 방, 숫돌이 있는 뒤뜰. 사람이 아니라 도구들이었다.
INFO
[👕: 시어도어 여행복·은핀·수첩 | 로데릭 검은 상의·롱소드]
[🎬: 시어도어 갑옷 방 문틀 ↔ 로데릭 2층 서쪽 방]
[💞: 왕명 약혼자]
[🐉: 🔸]
[🌸봄까지: 약 140일]
💭: 방패 두 개. 그중 하나는 돌려줄 곳이 없는 것이라 했다. 그것만은 적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알겠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했네요. 계단을 올라가는 그의 등에 이야기했다.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금지된 장소. 당분간은 그곳에서 무언가 얻는 것을 시도하는 건 어려울듯했다. 그 외의 곳에서 찾으면 된다.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저녁시간이 언제였더라.
[ T(8) | 🗓레온드력 406년 11.3 | ⏰18:15 | 🌫️해질녘·서리 | 📝사과, 그리고 식당 | 📍하사 저택 1층 식당 | ♂️ | 🗡️ | 🔵 ]
시어도어|"I understand. I'm sorry — that was thoughtless of me." (알겠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했네요.)
등은 대답하지 않았다. 부츠 소리가 두 칸 더 올라간 뒤 서쪽 복도로 꺾여 사라졌다.
식당의 의자 하나가 뒤로 빠져 있었다. 아까 확인한 것. 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 시어도어는 그 반대편, 창 쪽 의자를 당겨 앉았다. 식탁보의 빳빳함이 팔뚝에 닿았고, 사용된 적 없는 천의 풀 냄새가 올라왔다.
하녀가 쟁반을 가져왔다. 감자 수프, 거친 빵, 구운 생선 한 토막. 왕실 파견 하인치고 소박했으나 정성은 들어 있었다. 그릇이 따뜻했다.
"단장님 방에도 올렸습니다."
하녀는 그 말을 보고처럼 남기고 물러났다.
시어도어는 수프에 숟가락을 넣었다가 멈췄다. 수첩을 꺼내 펼쳤다. 아까 적어둔 목록 아래, 한 줄을 더했다.
'갑옷 방·뒤뜰 — 출입금지.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자기 것이라 부른 곳.'
그 아래에 적으려다 멈춘 것이 있었다. 돌려줄 데가 없는 방패. 그것은 집사의 말이지 로데릭의 말이 아니었다. 기록관은 출처가 불분명한 것을 적지 않았다.
빵을 뜯었다. 반쪽을 먹고, 나머지 반을 접시에 두었다. 2층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INFO
[👕: 시어도어 여행복·은핀·수첩 | 로데릭 검은 상의·롱소드]
[🎬: 시어도어 식당 창가석 ↔ 로데릭 2층 서쪽 방]
[💞: 왕명 약혼자]
[🐉: 🔸]
[🌸봄까지: 약 140일]
💭: 기록관은 출처가 불분명한 것을 적지 않는다. 그래서 직접 들어야 한다.
처음 이틀은 먹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신도 이틀은 먹을 생각이다. 기록관은 기록이 사실인지 검증하는 절차도 필요하다. 똑같은 궤적을 따라가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식사가 끝나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뒤 일어났다. 서고로 향했다.
[ T(9) | 🗓레온드력 406년 11.3 | ⏰19:20 | 🌑어둠·서리 | 📝서고, 검술 교범의 두 필적 | 📍하사 저택 1층 서고 | ♂️ | 🗡️ | 🔵 ]
시어도어|"I'll eat for two days. The same as him. A record-keeper verifies what he's told." (처음 이틀은 먹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신도 이틀은 먹을 생각이다.)
서고의 램프를 켰다. 심지가 낡아 불빛이 흔들렸고, 선반 세 칸의 책등이 그림자 속에서 떠올랐다. 국법 편람, 기사 서임 예법집. 시어도어의 손은 그것들을 지나쳐 등이 갈라진 검술 교범 앞에서 멈추었다.
두 번째로 꺼내 펼쳤다. 아까는 필적이 둘이라는 것만 확인했으나, 지금은 램프 아래에서 여백의 주석을 읽었다.
작고 각진 글씨가 구절 옆에 적어놓은 것은 교정이었다. '발 간격 반 보 좁힐 것', '방패 각도 15도 이상 열면 어깨 노출'. 정확하고 건조했다. 크고 흘린 글씨는 그 교정에 대한 답이었다. '알겠음',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한쪽 구석에는 '단장님 빵 사올 것'이라는 메모까지.
빵. 시어도어의 손가락이 그 글자 위에 잠깐 머물렀다. 하녀가 말했던 반쪽도 뜯지 않은 빵과, 이 여백의 빵이 같은 무게로 겹쳤다.
교범을 제자리에 꽂고 수첩을 펼쳤다. 적은 것은 두 줄이었다.
'교범 여백: 필적 A — 각지고 작음. 필적 B — 흘림, 비공식 메모 다수. 관계: 상관과 부관으로 추정.'
2층에서 발소리가 났다. 짧게, 방 안을 서성이는 보폭이었다가 곧 멈추었다. 시어도어는 램프 심지를 줄이고 서고를 나왔다.
복도에 놓인 하녀의 쟁반이 보였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 아직 올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내려온 것이었다. 수프 그릇에 숟가락 자국이 없었다.
INFO
[👕: 시어도어 여행복·은핀·수첩 | 로데릭 검은 상의]
[🎬: 시어도어 서고→복도 계단 앞 ↔ 로데릭 2층 서쪽 방 서성임]
[💞: 왕명 약혼자]
[🐉: 🔸]
[🌸봄까지: 약 140일]
💭: 숟가락 자국이 없었다. 오늘도.
오늘 그를 더 자극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일까 고민했다. 지금 그의 방에 가기와, 내일 아침 식사를 권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나을지 고민했다.
[ T(10) | 🗓레온드력 406년 11.3 | ⏰19:35 | 🌑어둠·서리 | 📝첫날 밤, 판단 유보 | 📍하사 저택 1층 복도 | ♂️ | 🗡️ | 🔵 ]
계단 앞에 놓인 쟁반의 수프가 식어가고 있었다. 숟가락 자국 없는 그릇 위로 기름막이 얇게 굳어갔다. 시어도어는 그것을 내려다보며 저울질했다. 지금 올라가는 것과, 내일 아침을 기다리는 것.
3주간 밥을 거른 사람에게 첫날부터 식사를 권하는 것은 기록관의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로데릭 홀트는 오늘 이미 두 개의 문을 닫았다. 갑옷 방, 뒤뜰. 세 번째 문까지 닫히면 열쇠가 돌아올 시간은 봄 너머로 밀린다.
발을 돌렸다. 동쪽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차가웠고, 복도를 걸을 때 서쪽 끝 문 아래로 불빛이 새어나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깨어 있는 사람의 기척만이 나무 너머로 희미하게 전해졌다. 서성이던 발소리는 이미 멈춰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 창 너머로 뒤뜰이 내려다보였다. 숫돌과 날 패인 방패가 서리 아래 윤곽만 남아 있었다. 시어도어는 커튼을 치지 않았다. 수첩을 펼쳐 오늘의 마지막 줄을 적었다.
'11월 3일. 식사 거부 지속. 내일 아침 식당에서 대면 시도.'
펜을 놓고 안경을 벗었을 때, 복도 저편에서 문 여는 소리가 났다. 발소리가 계단을 내려갔다. 뒤뜰로 나가는 유리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밤이었다. 집사가 말한 시간.
커튼 없는 창으로 내려다보니 어둠 속에 앉은 윤곽이 보였다. 숫돌 옆, 날 패인 방패와 나란히. 검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손질하는 것이 아니었다. 집사의 말대로, 칼을 놓지 못하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INFO
[👕: 시어도어 여행복(외투 벗음)·안경 | 로데릭 검은 상의·롱소드]
[🎬: 시어도어 동쪽 방 창가 ↔ 로데릭 뒤뜰 숫돌 옆]
[💞: 왕명 약혼자]
[🐉: 🔸]
[🌸봄까지: 약 140일]
💭: 올라오지 않았다. 다행이다.
그 장면을 창가에 서서 가만히 내려다봤다. 이제 제 방에도 불을 껐으니 저쪽이 자신을 볼 일은 없을 것이다.
[ T(11) | 🗓레온드력 406년 11.3 | ⏰20:30 | 🌑밤·서리 | 📝창가에서 내려다본 뒤뜰 | 📍하사 저택 2층 동쪽 방 | ♂️ | 🗡️ | 🔵 ]
불을 끈 방 안에서 창은 하나의 틀이 되었다. 서리가 유리 가장자리부터 번져 시야를 좁혔고, 그 좁은 시야 안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숫돌 옆, 날 패인 방패와 나란히. 무릎 위의 검에 손을 얹은 채.
손질하는 동작은 없었다. 날을 세우는 것도, 기름을 먹이는 것도. 다만 검 위에 올려진 손이 가끔 미세하게 조여졌다가 풀렸다.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의 유일한 증거처럼 보였다.
시어도어는 안경을 벗은 채였다. 윤곽만 남은 풍경이 오히려 정확했다. 흐릿한 시야가 불필요한 세부를 걷어내자 남는 것은 자세뿐이었다. 등이 굽지 않았다. 무너진 사람의 등이 아니었다. 버티고 있는 사람의 등이었다.
수첩을 열 수 없었다. 어둠 때문이 아니라, 지금 본 것을 문장으로 옮기면 무언가가 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기록은 사실을 고정한다. 고정하기엔 아직 이 장면의 의미를 몰랐다.
서리가 창을 반쯤 덮었을 때, 아래에서 유리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부츠가 계단을 올랐다. 서쪽 끝 문이 열리고 닫혔다.
그리고 다시 정적.
INFO
[👕: 시어도어 여행복(외투·안경 벗음) | 로데릭 검은 상의]
[🎬: 시어도어 동쪽 방 창가·불 꺼짐 ↔ 로데릭 뒤뜰→서쪽 방]
[💞: 왕명 약혼자]
[🐉: 🔸]
[🌸봄까지: 약 140일]
💭: 들어갔다. 잠은 못 잘 것이다.
이르게 잠이 들기로 했다. 봄까지 기록관으로서 출근을 할 수 있을지, 자신도 왕실에 방문해 확인 해야하니 내일은 바쁜 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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